어제 학교로 가는 수인분당선 지하철 안에서 그때를 상상했다.
가사없는 음악을 듣고있자면 어느 상황이든 머릿속으로 상영되었고, 좋았던 기억은 LG구형TV의 화질인 법이지만,
안 좋았던 기억은 4K를 넘은 초고화질로 상영되는 법이었다.
꼬박 고등학생이 되었던 나. 구체적인 날짜도 기억이 안 나는데,
기온과 습도를 알 수 있을 리 없어 건너뛰어본다.
그때는 할머니가 살아계셨다. 말하자면,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 싶은 할머니가 살아계셨다.
우리 할머니는 알츠하이머란 유쾌하고도 비극적인 병에 시달렸어,
24평 주공아파트의 공간이 지옥 같았다. 여타 할 미디어에선 할머니라는 게 나약하고 도움이 필요한 존재로 그려지지만,
아니다, 아니야. 그런 미디어를 보며 난 내내 고개를 저었다.
엉덩이가 사소하게 결리는 파란색 지하철 의자에 앉아,
나의 상상을 뿌리쳤지만 도저히 떠나가질 않았어. 프랑스 작곡가의 피아노 음악을 들었던 거 같은데
영어불가능자인 나로써는 제목을 구체적으로 서술할 수 없는 거다. 스마트폰을 열어 그 음악의 정체를 명백히 밝힐 수는 있겠다만,
그렇게 하지는 않겠다.
동백파출소에서 출동한 경찰과 119소방대원이 우리집 초인종을 눌렀다.
엄마는 초점이 나간 할머니의 손목을 잡고 제압하여 신발장 발치에 누워 엉켜있었다.
할머니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손목을 잡은 딸의 손아귀를 틀니로 깨물 작정으로 딱딱 소리를 연신 내었고,
나는 그 엉켜있는 두 여자를 넓찍 걸음으로 건너 현관문을 열었다.
경찰과 소방대원은 광경을 보고 어찌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고,
시끄러운 소리에 고개를 빼꼼 내민 1704호 아줌마가 보이길래,
난 신경질적인 표정을 지으며 들어가라 손짓했다.
왜 이러세요. 그만하세요.
경찰은 거의 길거리 취객 말리듯 두 여자를 대했는데, 할머니는 경찰을 보고 자신의 아들이라 생각하여
봉규야, 봉규야, 쟤 좀 봐라. 이제 엄마를 마 죽일라칸다.
하며 유난스런 몸짓으로 경찰 어깨에 매달렸다.
경찰은 소방대원과 눈을 한 번 마주치고는 나에게 시선을 돌려 천천히 걸어왔다.
내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죄인 마냥 꼼지락거리는 발가락 만을 쳐다보았고
경찰은 수첩을 꺼내며 나의 이름을 물어보았다.
김우근.
내 이름을 묻고자 하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청소년인 것을 이용하여 공직자에게 대들 깜냥은 안 될 청소년이었고,
이름 석자를 그 수첩에 넘겼다. 이어 경찰은 나의 생년월일을 물어왔다.
나는 1999년 9월 1일을 말하며 코가 시큰해졌다. 눈밑으로 용암이 차올랐으며
목젖으로 황소개구리가 기어올라오는 듯한 느낌으로, 결국 눈물을 쏟아내었다.
꽤 인과관계가 충족되고 맥락에 맞는 눈물이었는지, 경찰과 소방대원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한숨을 쉬며 나에게 뭐라뭐라 말을 했는데 기억이 나진 않는다.
경찰도 신발장 발치에 엉켜있는 두 여자를 넓찍 걸음으로 넘어 현관문을 통해 나갔고,
미약한 엘레베이터 소리를 들으며
혼자다.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눈을 질끈 감고 신음소리를 내는 엄마와 그만 지쳐 거친 숨소리를 뿜는 할머니와 같은 공간에 있었으면서도,
혼자다.
하는 생각이 미약한 엘레베이터 소리와 함께 내 모든 것을 장악했다.
그때의 기억이 왜 재생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그 4K를 뛰어넘는 화질의 상영관은 용산CGV 못지 않았으며, 그 편하다는 쇼파의자는 아니오라 파란색 지하철 의자에서, 내가 왜 그 기억을 꺼내었는지는 당최 모르겠다.
프랑스 작곡가의 피아노 음악을 들으며 나는 내일이 나의 생일이란 것을 인지한 순간에,
그 끔찍한 기억이 초고화질로 재생되었고,
대신, 눈밑으로 뜨거운 용암이 차오르거나 코가 시큰해지진 않았다.
꼬박 고등학생이 되었던 나는 어느새 24살을 먹은 청년이 되었고
1999년 9월 1일을 말하며 울음을 터뜨렸던 소년은
2022년 9월 1일을 살아왔다는 거다.
이런 지랄맞은 고통스런 기억들이 나를 무척이나 괴롭게하지만,
오늘은 뭔가, 다 용서하고 싶었다.
경찰도, 소방대원도, 엄마도, 할머니도, 1704호 아줌마도, 24평 주공아파트 가정집도.
그리고 나도.
왜 괜찮은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괜찮다고 위로하고 싶었다.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 아직 모르겠고,
말하자면 안 괜찮은 쪽에 중력이 쏠리는 것 같은데,
그럼에도 어쨌거나 괜찮다고 나를 쓰다듬었다.
오늘은 나의 생일이니까. 그래도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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