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시작, 유자차

길고양이가 보인다. 치즈고양이다. 마이나쓰 4도에 달하는 날씨에 빳빳해진 소나무 솔잎이 부는 바람에도 정지해 있다. 수분이 응결하여 서리가 형성된 벤치 의자에 나의 펑퍼짐한 엉덩이는 찹다.
찹단 말이다. 찬 밤바람이다.
겸손한 벼도 아닌데 고개를 숙인 가로등 놈이 난로 기능까지 갖추고 있으면 좋으련만. 기흥구청의 공무원 놈들이 우리 용인 시민들에게 그런 방대한 배려심을 지니고 있을 리 없다. 국가의 노예들은 생각을 높이 하려 하지 않으니까.
나는 추위의 노예다. 추위 때문에 동백마트에서 사 온 325ml 싸이즈 페트병에 담긴 꿀유자차를 홀짝댈 수밖에는. 이 유자차를 다 마시고 나면.
어디로 가야 하지. 저 치즈고양이는 또 어디로 가야 하나.
나의 집이라고 불리우는 곳은 실시간으로 쏘주에 취해 언어적, 신체적 폭력을 선사하는 엄마라는 사람이 점령하고 있다. 그런 엄마에게 개병신, 씨발년, 정신 좀 차리고 살아라 같은 뻔한 말을 뱉고 도망 나온 입장에서, 다시금 민망한 표정으로 집에 기어들어갈 순 없는 노릇이다. 그건 그런 것이고, 아직 고등학생의 신분이니 동백지구대에 방문해 불쌍한 표정을 한 번 지어볼까 했지만, 경험상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 될 것이다. 민중의 지팡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국가의 노예는 내 개인적 기분은 추호도 고려하지 않고 그 지옥에 준하는 집으로 날 돌려보낼 것이다.
고등학생의 신분. 그렇구나. 나 이제 고쓰리구나.
곧 새롭게 시작되는, 2017년의 새학기가 두려워진다. 별반 다른 고삼 애들처럼 입시 압박감에 대한 두려움은 아니다. 대한민국은 대졸 타이틀을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해버리지만 그런 건 아무렴 상관없다.
내가 두려운 건,
유통기한이 한 달쯤 지나버린 서울우유로 젖어버린 나의 칼하트 백팩 밑바닥과
사람의 치아로 골백번 씹혀 무한한 끈적함을 지닌 채 내 머리칼에 접착되어 버린 와우껌과
내 270 싸이즈 실내화 밑창에서 발바닥이 입성하기만을 기다리는 여덟 개의 압정들.
두렵다면 그런 것이 두려워진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괴롭힐 창의적인 방법론을 백분토론하고 있을, 김도준 무리를 상상한다. 325ml 페트병에 담긴 꿀유자차를 힘껏 삼키며 미지근함을 느끼고 또 생각한다. 이 유자차를 다 마시고 나면
어디로 가야 하지. 저 치즈고양이는 어디로.
터치감이 버벅이는 내 갤럭시S4 스마트폰으로 페북 피드를 좀 살펴보고는 내 유일한 친구 베트콩에게 페메를 보내보려다가, 이내 만다.
옵치 들와라 병신 베트콩련아
ㅈㄲ 롤중임
십퇴물겜 중단하고 삐까뻔쩍프리미엄명품 옵치를 하지 않겠니?
응 니애미
2017년 2월 23일, 어제로 기록된 마지막 페메를 보고는 친근한 기분이 든다. 지금 새벽 01시 26분에 내 상황이 이렇게 좆같으니 좀 니네 다문화 가정에 나를 재워주지 않으련? 하고 페메를 보내봤자 숙면 중일 확률이 농후하다. 베트콩은 내 유일한 친구가 되어준 놈이다. 게다가 김도준의 왼팔을 자처하고 있는 비실이가 2학년 2반 교탁 밑에서 그 이레즈미 문신한 빈약한 전완근으로 나의 안면을 열두 대 쯤 강타하고 있을 때 나를 유일하게 도와준 놈.
베트콩은 비실이의 어깨에 슬쩍 손을 올리고 이제 그만 좀 해라 하고 말했었는데, 비실이는 미쳐 날뛰며 니 베트남 애미까지 죽여버린다며 베트콩의 양 어깨를 밀쳤었다. 헌데 비실이 제 몸이 밀려났다. 베트콩은 용인고등학교에서 자율동아리로 헬스동아리를 설립할 정도로 헬스에 진심인 놈이었다. 꼬리빗을 들고 공주님 손거울을 든 여자애들도 보고 있는데 상황이 참 민망하게 된 비실이는 김도준이 리더로 있는 무리를 이끌고 왔고 이내 베트콩에게 다구리를 놓기 시작했다. 열 두 명의 다구리는 3대 420을 드는 베트콩의 몸을 쉽게 넘어뜨릴 수 있었는데, 가장 큰 문제는 베트콩이 어렸을 적부터 다문화 가정의 특수성과 동남아적인 외모로 한평생을 왕따로 살아 아집과 분노로 살고 있다는 것이었고(그래서 헬스로 몸을 키웠으리라 추정한다) 그 원동력은 베트콩이 가슴팍에 메고 있는 아디다스 힙색에 도루코 커터칼이 숨겨져 있기에 충분했다는 것이다.
그 사건으로 베트콩은 강제전학 처분에 놓였는데, 헬스트레이너의 길은 학력 따위 필요 없다며 자퇴를 선택하였다. 비실이의 흑백 이레즈미 문신에 7cm쯤 되는 도루코 커터칼 흉터를 그렇게 남기고는, 용인고등학교의 전설이 되어 떠났다. 베트콩에 대한 고마움과 씁쓸함을 어떻게 달래야 할까. 유자차를 홀짝, 마셔보고는 차가움을 느낀다. 당최 이 유자차를 다 마시고 나면
나는 어디로. 저 치즈고양이는 어디로.
저 제 발을 할짝대는 치즈색의 길고양이를 보면, 그 여자애가 떠오른다. 내가 속한 2학년 2반에서 한 발 떨어진 2학년 3반의 여자앤데, 머리칼 탈색을 하도 한 것인지 늘상 탈색모를 하고 있었다. 고양이 상에 눈 밑에는 점이 있었고 컬러 렌즈는 회색깔을 선호하여 영롱한 분위기를 내었다. 똥꼬치마와 꽉 끼는 블라우스로 희미하게 보이는 형형색색의 브래지어는 그녀의 시그니처였고, 흡연 문제로 교무실에서 종종 선생에게 한숨 소리를 듣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걸레였다. 아니, 걸레라고 소문이 난 여자애였다.
왜 사람들은 일정 수 이상의 사람들이 모여 집단을 형성하면 한 명의 걸레쯤은 꼭 만드는 걸까. 알 수 없다. 그 여자애의 잘못이라면 그저 학교에 잘 나오지 않거나 잦은 지각을 하였고 술담배를 하는 것쯤은 쪽팔려하지 않는 당당함을 지녔고 자신의 몸매를 과시하려는 욕구가 남보다는 좀 심한 편이었던 것뿐이다. 그녀는 학교 사람들 중 누구와도 진실된 친밀함을 가지지 못하고 성욕이 부글부글한 남학생들에게 음흉한 눈총만을 받는,
그런, 길고양이인 것이다. 사료와 츄르로 하여금 온갖 귀여움을 한 몸에 받지만 정작 집에 데려가주는 이 하나 없는, 그런.
나는 그녀가 신경 쓰인다. 왜 신경이 쓰이는지는 모르겠다. 언젠가 베트콩이 나에게 한 말이 생각난다.
니 오늘 숨 쉬는 거 신경 쓰임.
뭐래 베트남 냄새가.
니 눈 깜빡이는 거 오늘 하루종일 신경 쓰임.
응 쌀국수.
숨을 쉬는 것과 눈을 깜빡이는 것을 한 번 의식하고 나면 끝없이 신경 쓰이듯, 그 여자애를 언젠가 처음으로 학교 복도에서 마주하는 순간, 질리게도 신경쓰게 되었다. 성욕이 부글부글한 나이라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간지러움으로 한 번 긁고 난 어깨 뒷부분이 계속 간지러워 신경쓰이듯, 그렇게 말이다. 꿀유자차를 한 번 더 들이키고는, 325ml 페트병 내부에서 공허함을 느낀다. 유자차를, 다 마셔버렸다.
나는 어디로 갈까. 술 먹어 개가 된 울엄마는 어디로.
치즈고양이는 어디로. 베트콩은 어디로. 김도준은 어디로.
비실이는 어디로. 우리는.
곧 3월이다. 일주일이 채 안 되어 용인고등학교가 개학을 해버릴 것이다.
우리는 그 봄날로 간다. 이야기의 시작이다.
2017년. 정치인 안철수가 누굽니까! 하며 악을 지르고 아기상어 동요가 히트를 치고 주이의 트로피카나 송이 유행했을 때로. 일본 휴가를 보내고 귀국한 김무성이 자신의 보좌관에게 캐리어를 노룩패스한 게 인터넷 기사로 쏟아졌을 때로. 페이스북 김윤태가 니애미 거리고 아프리카TV BJ철구가 앙 기모띠하며 간장샤워를 하고 문재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새누리당이 죽상을 했던 때로. 전국 PC방에서 리그오브레전드와 오버워치가 씨름을 하고 김은숙 작가가 드라마 도깨비로 전 국민 아줌마가 공유에 미치게 만들고 작년 발생했던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하여금 젠더갈등이 극에 달했을 때로. BJ보겸이 보이루를 하고 삼양 불닭볶음면의 인기가 여전하고 쇼미더머니6의 우원재가 또또또또또또 약봉지를 찾았을 때로.
그 봄날로 간다.
(1447) [MV] Broccoli you too(브로콜리너마저) _ Yuja-Cha(유자차) - YouTube
바닥에 남은 차가운 껍질에 뜨거운 눈물을 부어
그만큼 달콤하지는 않지만 울지 않을 수 있어
온기가 필요했잖아, 이제는 지친 마음을 쉬어
이 차를 다 마시고 봄날으로 가자
우리 좋았던 날들의 기억을 설탕에 켜켜이 묻어
언젠가 문득 너무 힘들 때면 꺼내어 볼 수 있게
그때는 좋았었잖아, 지금은 뭐가 또 달라졌지
이 차를 다 마시고 봄날으로 가자
2025. 02. 05 수정
-'나'의 학교폭력 구체적임을 묘사할 때 '내가 두려운 건'을 추가하고
줄바꿈을 세 번 해냄으로써 가독성을 높임.
-베트콩의 자퇴 에피소드 묘사 도입부에 줄바꿈을 해냄으로써 가독성을 높임.
-2017년의 사건과 인터넷 밈을 늘어놓는 부분에 쇼미더머니6의 우원재를 추가하여 디테일을 높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