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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

인생의 플롯

[2022년 1월 11일에 써둔 글]

 

 85세, 완연하고도 완연한 노년의 나이인 나는, 용인연세요양원에서 탁한 눈빛을 하고 있는 병묵이에게 본죽의 야채죽을 떠먹여 주고 있다. 알츠하이머 증세로 자주 요양원의 난봉꾼이 되었던 내 친구 병묵이는 이제 에너지가 딸리는지 입을 에- 벌려 동태눈으로 야채죽을 얌전히 받아먹고 있다. 그렇게도 젊은 시절 활동적이었던 우리가, 언제 이렇게 늙어버렸을까.

 친구 병묵이를 처음 만난 건 20살, 대한예술대학교 영화과 OT 때였다. 우리는 첫 만남부터 삶과 예술의 가치관이 잘 맞아 서로의 죽마고우가 되기로 암묵적인 합의를 마쳤다. 그리곤 제2의 워쇼스키 형제(자매)가 되겠다는 다짐 하나로, 20살 때부터 70살까지, 스토리텔러로서 서로를 보완해 주고 맞춰가며, 여러 상업장편영화를 완성했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위대한 스토리텔러를 꿈꿨다. 그에 따라 병묵이와 나는 일종의 '예술 토론'의 장을 시도 때도 없이 열었는데, 결론 내지 못한 토론 주제가 딱 하나 있었다.

 '우리 인생의 플롯은 무엇인가?'

 로버트맥키의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 서적에 따르면 플롯의 종류는 아크플롯, 미니플롯, 안티플롯이 있었다만 우리는 우리 인생의 플롯을 결론짓지 못하였다. 병묵이는 위대한 스토리텔러가 되고자 하는 우리가 해당 주제에 관한 답을 내리지 못한 것에 퍽 괴로워했었다.

 앗, 야채죽이 그만 병묵이의 식도로 들어가지 못하고 입 밖으로 질질샜다. 요양사에게 휴지를 요청해 병묵이의 입가를 살살 닦으며 병묵이의 눈을 보았다. 그렇게도 열정적이었고 호기심 짙었던 눈이 이젠 회색눈이 되어 청춘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병묵이가 아직도 궁금해할진 모르겠지만, 내가 내린 결론을 얘기해보련다. 우리 인생의 플롯은 무엇인가,에 대한, 나라는 스토리텔러는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 병묵이가 들을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청년, 아크플롯

 우리는 이 세상의 단일적인 주인공이었다. 위대한 스토리텔러의 꿈을 확신했기에, 그 길로 향하는 도중 어떤 괴로움의 내적갈등이 와도 신경 쓰지 않고 외적갈등만을 해치며 나갔다.

 우리는 노력이라는 인과성을 철저히 신뢰하며 이 연속적인 시간의 끝은 기필코 성공이라 믿었다.

 그렇게 활동적인 우리는 이 세상의 주인공이었으며 우리를 방해하려는 요소들을 나름의 전략으로 헤쳐나가며 대학시설을 보냈고, 졸업과 동시에 시나리오 공모전이란 공모전은 모두 참가하며 우리의 몸값을 불려 나갔다. 단편영화로 시작해 필모그래피를 늘려갔고, 투자를 받는 데에 성공해 장편상업영화를 만들기까지,

 우리의 인생은 아크플롯이었다.

 

 중년, 미니플롯

 스토리텔러로서, 프리랜서로 먹고살 만큼의 자리를 잡게 되었을 때 우리의 나이는 완연히 중년에 접어든 40살이었다. 동시에 우리의 인생은 미니플롯이 찾아왔다.

 청년시절의 활동적임은 어느새 수동적으로 변했다. 우리는 느꼈는지도 모른다. 이 세상의 주인공은 내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돈을 위해 외적 갈등에 굴복하여 남이 쓰라는 이야기만을 공장처럼 찍어낼 뿐이었고, 우리의 위대했던 꿈과 현 상황의 간극은 외적갈등 보다 내적갈등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이 세상의 주인공은 많았고, 그것이 결코 우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미니플롯이었다. 

 

 노년, 안티플롯

 우리는 미니플롯의 삶을 꾸역꾸역 연명하며 65세의 나이가 찾아와 노년을 맞았고, 나는 노년을 맞았어도 미니플롯의 삶을 살았지만 병묵이는 아니었다.

 병묵이의 인생은, 안티플롯이 찾아왔던 것이다.

 병묵이는 알츠하이머 병을 앓았다. 기억의 파편이 여기저기 흩어져 비연속적인 시간 안에 사는 듯했다. 병묵이의 돌발행동은 인과성 없이 발생해 여러 사람을 놀라게 했으며, 매일 매일 병묵이는 일관되지 않는 행동과 언어를 반복했다. 보편적인 사람들의 고전적 삶의 형식을 거부하는 듯한, 병묵이의 삶의 플롯은

 안티플롯이었다.

 

 병묵아, 우리 토론했던 거 기억나냐?

 왜, 우리 인생의 플롯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였던 적이 여럿 있었잖냐

 너와 달리 나는 운 좋게도 제정신으로 살며 느꼈는데

 우리 인생의 플롯은 하나의 플롯으로만 규정되지 않더라

 누구는 아크플롯을 지나고, 미니플롯은 지나며, 어떤 운 나쁜 이는 안티플롯 속으로 들어가더란 말이야

 그리고 안티플롯을 운 좋게도 피한 나는 어떤 플롯의 인생을 살고 있는지 아냐?

 너는 안티플롯으로 삶을 마감하겠지만 나는 논플롯으로 남은 인생을 보낼 것 같다

 내 인생의 이야기는, 이제 하루의 결말이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어

 오늘과 내일의 인과성의 경계가 허물어졌고

 어제와 내일의 의미는 이제 퇴색됐다

 하루하루, 오늘의 이야기가 끝인 것처럼, 그렇게

 

 병묵이는 위대한 스토리텔러를 꿈꾼 자로서, 나의 인생과 플롯에 대한 의견이 흡족했던 것일까. 야채죽은 꿀떡꿀떡 잘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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