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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

아파트 층을 세는 남자

엄마가 먹었을 것이 분명한 엄청난 수의 수면제 봉지와 A4 용지 한 장 분량의 유언장이 식탁에 놓여 있었고

나는 그걸 한 자 한 자 정성들여 읽을 감정 상태값이 아니었으므로

당장 엄마의 방문을 열었고 그 불 꺼진 방에서 멎을 듯한 고요함에

감싸져 누워 있는 엄마의 실루엣을 보았다.

나는 소리를 지르거나 눈물을 내지 않았거나, 낼 수 없었다.

나의 몸이 놀랍도록 차가워지는 것이 느껴졌고 그대로 천천히 걸어나가

아파트 복도 계단에 착석을 해냈다. 시체와 같은 집에 있는 것이 소름끼쳤기 때문이다.

119에 전화를 할까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119는 위급상황 따위에 콜을 하는 것인데

현 상황은 분명하게 위급상황이 종결 돼있지 않나.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친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 엄마 죽었어. 라는 어처구니 없는 말을 들은 친형은 악쓰듯 소리를 질렀다. 주파수가 잡히지 않아

파열음이 스마트폰 너머로 전해져 왔다. 일일구! 일일구! 우근아! 일일구!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시체가 무서워서, 위급 상황은 종결이 된 것 같아서

아파트 복도에 앉아 119에 전화를 하지 아니 한 게 아니라

엄마의 시체 실루엣을 목격하고는 패닉에 빠져 어떠한 논리적 사고도 못하는 인간이 되어

멍 때린 채로 앉아 있었다는 것이다. 119에 전화를 했다. 엄마가 자살을 했다고 했다.

구급대원은 숨을 쉬는지 확인해 봤냐고 했다. 생각해 보니 시체를 보았을 때 검지를 코 밑에

가져다 대보는 그런 간단한 기본 절차도 나는 수행해내지 않았었다. 구급대원과 통화를 끊지 않은 채

집으로 뛰어 올라갔다. 엄마가 숨을 쉬는지 확인했다. 나의 검지에는 엄마의 숨이 닿았다.

쏘주와 수면제에 취해 구급대원이 와서도 엄마는 헛소리를 했다. 이 일이 있은 후

나의 시그니처 습관이 생겼다. 집에 들어가기 전에는 17층의 우리집 불이 켜져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불이 켜져 있다면 조금은 안심을 했고 불이 꺼져 있다면 시체를 볼 수도 있겠다는

긴장을 어느 정도 하며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를 수 있었으니까. 처음에는 17층을 1층부터 일일이 세어냈다.

그러나 하도 많이 그 17층을 세어보아서, 나는 이제 본능에 가깝게 17층 우리집을 두눈으로 찾아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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