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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

오늘 꿈에는 너가 나왔다

 

어제 10시 50분 경의 보름달을 보았니. 달이 저렇게도 클 수 있구나, 느껴지는, 마치 어린이대공원에서 코끼리라는 동물을 직접 마주했을 때의 그런 기시감을 안겨다 주었던, 그런 보름달이었다. 또 먹구름에 월광이 흐려져 보름달은 주황빛을 뿜었는데 내가 그 달을 보았을 때는 석성산에 모습을 가리고 있어 마치 산불이 난 것 같았다. 각 지역의 산불이 흐름을 탔을 때라 꽤 급한 마음으로 붉은 석성산을 사진 찍어 친구들에게 DM을 보냈다. 나의 친구들은 아무래도 산불이 맞는 것 같다며, 얼른 119에 신고를 하라고 하였다. 3분쯤의 고민 후에 갤럭시스마트폰에 119 다이얼을 터치하였고 백현그린빌아파트 쪽에서 석성산 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산불의심이 된다고 말하였다. 구급대원은 당황하지도 않고 웃음 섞인 목소리로 현재 시각 그런 산불의심 신고가 많이 들어오고 있는데, 달이 워낙 크게 떠서, 그게 산 뒤에 가려져 붉게 보이면 그런 의심들을 많이 하신다고 친절하게 말하였다. 전화를 끊고 나니 놀랍도록 석성산 뒤편으로 상당한 코끼리 보름달이 떠 있었다. 119 다이얼을 누른 내 손가락이 삐질삐질 땀 흘리며 민망할 정도로. 그래, 이 얘기를 꼭 너에게 하고 싶었다.

 

오늘 꿈에는 너가 나왔다.

우리는 츄리닝 복장으로 서울 어딘가를 걷고 있었다. 강남역 10번 출구쯤 골목길이 생각나는 풍경이었다. 너는 어느 프린팅 하나 없는 회색 후드집업을 입고 있었는데, 그 오버핏 후드집업 속에 얼마나 아담한 몸이 숨겨져 있는 걸 아는 나는 그게 귀여워 죽을 뻔했다. 해서 어깨에 손을 올리며, 허리에 손을 감싸며, 그런 스킨쉽으로 우리는 걷고 있었다. 식당을 가고 있었다. 메뉴는 부대찌개. 우리가 그 몇 년 전 실제로 강남역 데이트를 해낼 때 저녁 끼니로 갔었던 그 부대찌개집이 맞다. 걸으며 걸으며 나는 강박적으로 너에게 나의 이사 계획을 설명했다. 내가 이사를 해냈을 때의 내 자취방 원룸은 정말 예쁠 것이라고. 나의 취향이 온갖 도배되어서 나의 원룸으로 들어오는 순간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 기획의도가 분명히 드러날 것이라고. 너가 좋아하는 우유에 말아먹는 온갖 시리얼들도 구비해 놓을 테니, 언젠가 꼭 놀러 오라고, 강박적으로 반복적으로 말했다. 나는 그곳에서 글을 쓸 거야. 그림도 그릴 거고, 음악도 시도할 거야. 무엇보다 너가 그리도 걱정했던, 나의 경제적 안정을 이룰 공간이라고. 나의 미래를 설계할 곳이라고. 그러니 이런 나의 아름다운 자취방에 놀러 와달라고. 알았다고 대답하는 너에게도 꼭 확신을 가지고 싶어서 진짜야? 진짜지? 지겨워진 너는 아, 알겠다고, 알겠어. 티격태격하는 20대 중반의 커플, 강남역의 밤공기. 그리고 맡는 순간 보라색이 생각나는, 너의 옷에서 풍기는 섬유유연제 냄새. 너는 부대찌개를 먹을 때도 너의 가장 매력적인 점 중 하나인 반달눈으로 웃어줬고, 배시시 귀엽게 웃어줬다. 잠에서 깨었을 때 한 5분을 멍 때렸다. 너의 반달 눈웃음을 재차 보고 싶어서 눈을 감고 감아봤지만 담배 생각만 났다.

오늘 고기집 알바에 출근을 해서는 동료직원들이 대화하는 것을 상추를 씻으며 엿들었다. 동료직원은 내일 인천을 가야 한다고 말했고, 그 이유로는 중요한 택배를 인천의 본가로 잘못 시켰다고 말했다. 오늘 꾼 꿈의 영향 탓에 연신 너의 생각을 놓지 못하고 있던 나는 재차 궁상맞게도 너를 떠올려냈다. 너는 나의 생일선물을 용인의 본가로 택배를 시켰어야 했는데, 바보 같이도 너의 서울 자취방으로 시켰었다. 해서 나의 생일을 기념하는 데이트의 출발은 2시간가량 버스를 타고 너의 자취방으로 향해야 했었다. 나는 그게 좀 서운하고, 화가 났다. 내 생일 스케줄을 이렇게 망친 것을. 왜 바보 같이 택배를 잘못 시켜서 생일 같은 날 2시간 동안 버스 멀미를 해야 하는지. 그러나 나의 생일선물인 것이라 대놓고 화를 낼 순 없었다. 그런 꾹꾹 참는 맘이 투덜투덜로 변모해서 너에게 불평을 했었는데 그게 도를 지나치자 너는 말했다. 너는 차도 없으면서 버스 타는 걸 왜 이렇게 싫어하냐고. 우리 관계에 적확한 균열이 생겼던 사건은 그렇게 생겼다. 안타깝게도 나는 여타 다른 남자 또래 애들과 다르게, 차도 없고, 차를 물려줄 부모도 없는 것에 열등감과 자격지심을 그득그득 심어내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너가 준 생일선물을 면목동 길바닥에 내팽개치고 뒤돌아 걸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지금 쯤이면. 이런 산문 하나 제대로 써내려면, 구성이란 걸 맞춰야 한다. 작법에 의거해서 오프닝과 전개에서 기인된 엔딩으로 매듭지어야 한다. 이를테면 오프닝에 써놓았던 보름달 이야기를 너의 매력인 반달눈과 엮어내어 진실을 보지 못했다, 뭐 이런 식의 상투적인 주제지점이라도 잡아야 하겠지. 그러나 엔딩을 거부한다. 엔딩을 내기가 싫다. 저 보름달 이야기는 나의 일상 속 시시콜콜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저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너에게 맘 편히도 할 수 있었던 때가, 참 상투적이고 지리멸렬하고 구태의연하지만. 그립다. 정말로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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