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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

주사위 굴리기

 

2005년 쯤일 거다.

그때의 메이플스토리는 캐릭터를 생성할 때 주사위를 굴려야 했다. 캐릭터의 기본 스탯을 정해주는 주사위였다.

나는 뭣도 모르고 그 주사위를 제 멋대로 굴렸다가,

STR 스탯이 제일 높은, 마법사 캐릭터를 생성해냈다. 황철순 급의 근육질 마법사, 모순의 캐릭터를 생성해낸 것이다.

레벨 8을 찍곤 에너지 볼트를 배웠다. 레벨 12를 찍곤 매직클론을 배웠다.

매직클론으로 리스항구에서 빨간 달팽이를 사냥할 때, 메이플스토리 유저들의 '와, 와, 멋있다' 감탄사는 잊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근육질 마법사는 레벨이 오를수록 한계가 왔다. 엄마, 그리고 친형과 함께 찜질방에 갔을 때였다. 우리 형제는 500원에 20분 이용 시간을 주는, 찜질방에 딸린 PC방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난 당연시, 나의 매직클론을 뽐내려 메이플스토리에 접속했다.

그렇게 한창 PC방에 모인 아이들이 내 매직클론에 감탄하고 있을 때, 나보다 한 두 살 많아보이는 덩치 큰 형이 비웃음을 섞으며 말했다.

"마법산데 힘 찍었네. 완전 개망캐네."

자존심이 상한 난 그 덩치 큰 무서운 형에게 대들었다. 마법산데 힘 찍으면 안 되는 법 있냐고, 그딴 규칙은 누가 정한 거냐고, 내가 레벨 높여서 증명할 테니 한 달 뒤 다시 이곳으로 오라고.

그리고 나의 근육질 마법사 캐릭터는, 레벨 15를 찍고 주황버섯에게 연속 죽음을 당해 한계를 느끼며 캐릭터 삭제를 감행했다. 혹여 그 덩치 큰 형을 마주칠까, 그 찜질방엔 다신 가지 않았다.

 

나라는 사람이 태어날 때도, 주사위라는 걸 굴렸을 것 같다. 나의 기본 설정값과 한계값은, 그때 정해졌을 거다.

예상컨대, 인간에게도 그런 기본 설정값을 정해주는 주사위가 정말 실존한다면,

그 많은 스탯의 영역 중, 나라는 캐릭터는 '허세', '허풍'의 스탯이 제일로 높게 찍혔을 거다. 허세와 허풍이 기본 설정값으로 맞춰져 나라는 캐릭터가 생성됐다고 쳐보자는 거다.

나는 허세가 많다. 멋있는 걸 갈망했고, 내가 멋있길 원했다. 현실의 내가 멋있지 않다면 각종 수단을 가리지 않고 나를 멋있게 만들었다. 그것이 혹여 거짓말이래도 멋있는 나를 만들기에 급급했다.

 

아마추어 극단에 들어가 연극을 올린 건 나를 멋있게 만들어 줄 아주 좋은 명분이었다. 뭣 모르는 사람이 보면 자유로운 예술 영혼의 청년 쯤으로 보였을 거다. 그 실체는 대본 저작권도 지키지 않는 불법 연극인들의 집단이었고, 예술을 꿈꾼다고 말로만 떠드는, 집에 돈 좀 있는 사람들의 집단이었다.

나는 나의 허세를 위해 그 집단에 내 몸을 맡겼다. 내 영혼을 헐값에 팔았다. 나는 그들을 비난할 자격이 되지 않는다. 그들과 융화되어 아주 잘도 지냈다. 정신을 차렸을 땐, 20대 초반이 뭉뚱 사라져 있었고, 남은 건 경력이라고도 불릴 게 못 되는 불법 연극 포스터 세 장이었다.

나를 멋있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허세를 부리기 위해 나의 소중한 2년이란 시간을 날렸다. '자유로운 예술 영혼의 청년'으로 간신히 치장한 내 몸이, 한 순간에 벌거벗겨져 고졸 백수가 되었다.

 

"마법산데 힘 찍었네. 완전 개망캐네."

덩치 큰 형이 찜질방에서 날렸던 비소 섞은 비난이 떠올랐다.

"예술하겠다는 새끼가 허세 스탯 찍었네. 완전 개망캐네."

라고 대입하여 내 상황을 설명해도 오차가 없었다. 나는 그야말로 개망캐인 거다. 허세로 인해 '나'라는 사람도 진실되게 못 보여주는 병신이 무엇을 표현하는 일을 하겠다는 건, 마법사가 되겠다는 자가 힘 스탯을 찍는다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나는 주사위를 한참 잘못 굴려 허세를 기본 설정값으로 지니고 태어난 자다. 근육질 마법사도, 나도, 결국은 개망캐인 거다. 똑같이 주황버섯에게 연속 죽음을 당하며 한계를 느꼈다. 한계를 느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

2005년 시절, 나의 근육질 마법사를 더욱 키울 방법이 있었다고.

주황버섯에게 연속 죽음 당하지 않고, 언젠가는 스톤골렘을 잡을 만큼 육성해낼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고.

방대한 메이플스토리 지식을 겸비한 그 덩치 큰 형에게 싹싹 빌어, 그 형과 파티를 형성하여 일종의 쩔을 받으며 내 캐릭터를 육성해낼 수 있었을 것 아닌가.

아니면 전사 캐릭터를 잘 키우고 있는 친형에게 부탁해 파티를 형성하여 쩔을 받았을 수도 있었을 거다.

아니면 나도 멋드러진 스킬을 쓰는 유저에게 다가가 '와, 와, 멋지다' 칭찬일색하며 파티를 신청해 쩔을 받았을 수도 있었을 거다.

먼 얘기일 테지만, 그렇게라도 노력했다면, 언젠가 타락파워전사에 버금가는 위인이 됐었을 수도 있을 거 아닌가. STR 스탯을 찍은 마법사의 한계를 뚫고 만렙의 꿈을 이뤘을지 누가 아는가. 타인의 쩔이라도 받았으면 말이다.

 

오늘날의 나또한, 쩔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이름을 열거하기엔 그들이 부담스러울 수 있으니 자제한다만,

나를 응원해주고, 지적해주고, 사랑해준 덕에,

기본 설정값으로 형성된 허세 짙은 성격의 한계를 뚫고,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었다.

파티 신청을 누가 먼저했는지는 헷갈린다만,

나는 분명히 여러분들의 쩔을 받았고, 1이라는 수치의 레벨은 높일 수 있었던 것 같다.

타락파워전사가 되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지만,

내게 쩔을 해준 이들을 잊지 않으며 한 단계 한 단계 계속 레벨을 높여나가야 하겠다.

물론 쩔을 받기만 하는 양아치는 될 수 없으니,

나또한 이들에게 쩔을 해줄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이겠다. 나의 도움이 닿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쩔을 받고 레벨을 높인 나는,

찜질방의 덩치 큰 형을 이젠 마주칠 수 있다. 거 봐, 되지 않냐고, 역으로 비웃음을 날려주고 싶다. 이제는,

그 찜질방에 나의 얼굴을 기웃거려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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