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말하지만, 대한예술대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번 더 말하지만, 대한예술대학교에서 있었던 실화다.
드라마창작기초라는 극작과의 전공필수로 개설된 수업에서,
고교수님은 60분 러닝타임의 드라마 단막극 로그라인을 과제로 출제했었고,
대코로나 시대의 후유증으로 각자의 단막극 이야기를 발표해 보는 시공간은 무려 ZOOM이 되었겠다.
자신의 애완묘를 배경이미지로 설정한 관종 녀석과 우주를 떠다니는 녀석과 배경을 아예 모자이크 해버린 녀석을 넘어, 나에게로 발표 차례가 넘어왔다. 저질 수준의 화질로 동기들의 지루한 얼굴이 보였고
나의 이야기는 장애인을 소재로 했다. 지구종말로 인류가 파산된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한 장애인 커플이 타임머신을 개발했지만 차별과 멸시가 만연했던 인류 과거로 돌아가지 않겠다 결정하는 전개의 이야기였다. 나의 발표가 끝나갈 즈음, 안면도 없는 어떤 동기 학우가 ZOOM이라는 시공간에 채팅기록을 남겼는데, 그 내용은 가히 주먹을 불끈 쥐게 하였다. 그 채팅을 타이핑한 주인공의 가명을 김운숙으로 해보자.
김운숙은 내게 장애인 분들을 너무 가볍게 다루는 것 같다며 지적하였다. 좀 더 깊은 생각을 가져보는 게 어떠냐는 조언까지 더해서 말이다.
그 채팅을 읽자마자 이마의 굵은 힘줄이 빡, 서버렸고 알아서 하겠다는 소리를 육성으로 뱉어버렸다. 고교수님의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이어 ZOOM교실은 금방 뻘쭘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김운숙은 분위기를 수습이라도 해보려는 듯 자신이 남긴 채팅에 첨언을 더했다. 대충 나의 5분 동안 했던 발표의 뉘앙스가 장애인 분들을 가볍게 다루는 듯하여 조언을 주고 싶더랬다. 나는 그 즉시 마이크 음소거를 해제하곤
그럼 내가 장애인이라고 말할 때 쩔쩔매는 모습을 보였어야 하는 거냐고,
장애인을 같은 사람으로 대하자고 말하는 당신네 같은 사람들은 왜 항상 그들을 입에 올리기도 조심스러운 존재 취급하며 차별에 앞장서는 거냐고,
나는 김운숙이란 고유명사를 그냥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장애인이란 단어도 그냥 말할 수 있는 거라고
당연히, 말하지 못했다. 음소거를 해제하지도 않았다. 나 역시 사회적 동물이고 학교생활을 해야 하는 블라블라는 솔직히 부차적인 것이고,
쫄았던 것이다. 말하자면 글 쓰는 사람들이 모인 진보적 성향의 집단에서 이러한 나의 생각을 말했다간 일베충으로 심판 내려질 게 뻔하였다. 그때 당시 쫄아버려서 네, 감사합니다. 하고 말았던 나를 대신하여, 지금에서야 자존심을 한 번 부려본다. 사실 이건
대한예술대학교가 아닌 서울예술대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밝히면서 말이다.
김운숙이란 녀석은 겨우 5분 남짓한 시간 과정에서, 나를 거의 장애인을 멸시하는 인간으로 결과 도출하였다.
실은 뻔한 결과였다. 진보적 성향의 단체에서(나 또한 진보 성향을 자처하고 있긴 하다만) 장애인은 아주 조심스럽게 다뤄져야 한다는 것을 나는 분명 알고 있었다. 허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김운숙이란 명사를 뱉을 수 있듯 장애인이란 단어를 뱉은 것뿐이고, 어떠한 약자를 조심스럽게 다룬다는 현상에서 꾸물대는 모순이 나한테는 있기 때문이다.
으레 그래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으레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겠지.
헌데 우리가 그들보다 당최 무엇이 뛰어나다고 아기 다루듯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해야 하나?
또 '다룬다'는 표현은 뭔가? 우리가 뭔데 '다룬다'는 표현을 쓰는가?
변호사를 변호사라고 부르는데, 왜 장애인은 장애인 분들이라고 높여야만 하지? '낮다'라는 기본적 인식에서 기인된 반작용 아닌가?
그럼 뭐가 맞는 거고 뭐가 틀린 거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복잡한 세상의 관념에서,
나는 나대로,
내가 직접 찾아본 11편의 장애인을 소재로 한 영화로,
내가 직접 장애를 가진 친구들과 교류했던 경험으로,
내가 직접 사회복지학 발달장애 분야를 공부하는 친구에게 자문을 해 얻은 답을 토대로,
내가 직접 생각해 낸 것을 태도로 실천했다는 것이다. 나는 나만의 방식대로 김운숙이가 신성시 여기는 그들을 존중한 것이며
으레 해야 하는 것을 휘둘리듯 본따 따라가는 것을 생각의 노예로 작명한 탓에
나는 내 경험으로 내가 생각한 것을 내가 실천하고 싶은 사람이다.
뭐가 맞고 틀린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틀릴 수도 있겠지.
허나 남의 생각이 아닌 나의 생각으로
내 생각의 주인은 나라는 강박을 지켜내려고 하는
나는 옳다. 으레 그래야 하는 것들은 자꾸만 나를 노예 삼으려 하여 머리에 족쇄를 채우려 한다.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이러한 패기 정도는 있어야겠지. 겁난다지만,
서울예술대학교에서 있었던 실화라고 말할 정도의 용기는 지니고 살아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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