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이나 장례식을 하더라도
나는 절대로 축의금이나 조의금을 명목으로
지인들에게 돈을 받지 않겠다. 절대로 그러겠다.
결혼식.
이런 나를 사랑해 줄 여자(나는 완연한 이성애자이므로)가 생긴다면,
그리고 나의 논리정연한 사치스런 결혼식의 불필요함과 비출생주의를 이해해 주는 여자가 생긴다면
결혼식이란 걸 하게 될 텐데.
축의금을 명목으로 지인들 삥을 뜯기가 싫다.
그 현장은 나와 내 와이프를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자리다.
진심 어린 박수와 미소, 그 외에 필요한 것은 없다. 돈 같은 게 여기서 왜 끼는지 모르겠다.
전통 같은 으레 그래 왔다는 소리는 박살낼 필요도 없이 멍청하고
축의금 또한 사회적 유대의 표현이라면 그 표현 방식을 달리 할 방법을 강구할 것이다.
나는 스물 일곱 살이고, 주변에 결혼하는 친구가 있다면 오만 원 내지 십만 원을 봉투에 넣어내야만
그 결혼식장에 뻔뻔히 입성할 수 있다. 헌데 그 값을 하냔 말이다.
기획 같은 건 온통 식장에 맡겨 놓고 투자자의 포지션으로 돈만 대면서
어찌 그런 파티의 현장에 티켓값을 최소 오만 원으로 책정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최소 오만 원이라면, 재밌게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똑같은 인테리어와 똑같은 의상과 똑같은 진행,
온갖 상투적임으로 발라놓은 현장에 신랑신부에 대한, 식장에 대한, 식장의 밥에 대한
비관적인 평가만 나뒹군다. 이런 결혼식을 너무도 많이 봤다.
내가 그런 결혼식을 진행한다면, 나는 그 결혼을 자랑스러이 여기지 못할 것 같다. 평생.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결혼식의 형태를 띈 개 재밌는 파티를 펼치며
축의금 같은 건 엿이나 바꿔 먹고 신나게 놀다가 가라고 하고 싶은 것이다.
장례식.
결혼식의 축의금은 내가 쓸 수라도 있지, 장례식의 조의금은 내가 쓸 수도 없는 돈이다.
나는 죽었기 때문이다.
나의 가족을 생각해서 조의금을 준다면, 그런 조의금 받지 않고도 잘 살아왔는데 왜 갑자기 주는 거며
장례식을 치를 때에 경제적 부담 탓이라고 변명한다면 장례식을 극도로 간소화하던가 아예 치르지 않는 방식으로
내 죽음을 장식해야 한다. 결혼식도 그렇지만, 장례식의 주인공은 완연히 나다. 하물며 결혼식의 주인공은
2인 체제이지만 장례식은 나 홀로의 주인공이다. 더욱이 나를 생각하며, 슬프면 슬퍼야 하고 기쁘면 기뻐야 한다.
돈 같은 게 껴서 어느 개인적 부담이나 티끌만큼의 불순한 게 끼지 않았으면 좋겠는 거다.
그리고 나는
살아 있는 동안에 축의금과 조의금을 성실히 납부하고 다닐 것이다.
여전한 사회적 맥락은 축하와 슬픔의 성의 표시로 어떻게든 화폐를 납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통념에 내가 완전히 탈출할 수 없다. 나도 사회인이니까.
그러나 나는 절대로 축의금이나 조의금 같은 걸 받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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