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에서 할아버지 역을 맡은 바에 따라, 수염을 길렀다.
나의 수염이 이토록 무성하게 길러지는지, 난생 처음 알았더랬다.
여자친구의 눈치를 살살 보며 수염을 지켰다. 사용하던 일회용 면도기들을 서랍장에 쳐박았다.
연극을 하며 사람들을 만났다. 좋은 사람들이었다.
모두가 자신이 맡은 바에 최선을 다하였다. 소위 '빌런'이라 불릴 사람이 없는,
탁월한 집단이었다.
연극이 끝났다. 세 달의 시간은 단 이틀 만으로 막을 내렸다.
암전과 암음을 끝으로 관객은 배우들에게 꽃다발을 전달하고, 다시금 각자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나는 면도를 했다.
면도를 할 땐 퍽 아쉬웠다. 거지 같은 수염을, 싫은 척 하면서도 꽤 정내미가 들었었다.
샤워를 마치고 거울을 보며, 수염이 꽤 잘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을, 나 솔직히 했다.
그러나 연극과 같이 수염 또한 허무하게 떨어져 나갔다. 수염이 퍽 아쉬웠지만, 일상의 공간에서 알바를 하고, 여자친구를 만나는 등의 교류를 원만히 지속하려면,
수염은 깎였어야 맞았다. 퍽 아쉬웠지만, 땅을 칠 정도는 아니오라.
사람들과 술을 마셨다. 연극의 3대 요소 중 하나라 불리우는 '쫑파티'에 참석했다.
술잔이 몇 번 오가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사람들은 떠났다.
다시 보자고 말했지만서도, 사실 내심 인지하고 있었다. 우리의 친밀과 애틋은, 시간이 갈수록 감소하고 말 것이다.
사람 만나는 게 그토록 싫다고 떠들고 다녔지만, 막상 사람들이 떠나간단 생각을 하니,
퍽 아쉬웠다.
하지만 연극은 끝났고, 이 사람들은 떠나야 하는 게 맞았다. 연극은 일상이 아니라 일탈에 가깝다.
일상의 삶으로 다시금 돌아가야 하니, 이 사람들은 떠나는게 맞았고, 연극과 같이 사람들도 허무하게 떠나갔다.
퍽 아쉬웠지만, 땅을 칠 정도는 아니오라.
수염 밀은 얼굴은 말끔해졌다.
사람들이 떠나감에 따라 나의 인간관계도 복잡함 없이 말끔해졌다.
아쉽지만, 땅을 칠 정도는 아니니,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을 때의 절망도 견딜만 했다.
웬만해선, 연극을 다신 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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