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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

김우근의 대화수집5 : 상대성 이론

오후, 사거리 횡단보도

큰 사거리.

할매,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다.

오토바이, 쌩- 하고 지나간다.

포크레인, 탈탈탈탈, 천천히 지나간다.

남자, 통화를 하며, 등장.

 

남자: 마중 나오라니까. 여기 그 큰 사거리. 신호 기다리고 있어. 거기 어딘지 몰라. 아이, 참. 봉구포차 옆에 그 술집 말하는 거야? 동네가 바뀌어도 너무 바뀌었어. 2년이면 강산도 변하지. …그치, 1년 6개월이나 2년이나… 신호 방금 바뀌었어, 한참 기다려야 돼. 그래. 마중 안 나올 거면 길이나 알려줘. 니가 여자애들 불러주니까 참는 거야 인마. (사이) 친구 한 명 더 부른대? 야- 그럼 쪽수가 안 맞잖냐. 부를 애 있어? 아니, 걔 누구냐. 석기. 김석기. 걔 전역했지 않았나?

 

남자, 할매를 발견한다.

 

남자: 어… 그, 잠깐 끊어 봐. 다시 전화할게. 어어- 아니 잠깐만.

 

남자, 전화를 끊고 할매를 향해 조심히 걸어간다.

 

남자: 저… 안녕하세요.

할매: ……네, 안녕하세요.

남자: 할머님, 저 기억 안 나세요?

할매: 깜빡깜빡해서… 누구였더라?

남자: 6동 할머님 아니세요?

할매: 어… 그래, 6동.

남자: 저 1703호…

할매: 아! 큰 아들!

남자: 아뇨, 아뇨. 작은 아들.

할매: 아이고! 아이고, 이놈아.

남자: 하하…

할매: 못 알아보겄네. 접때 보다 더 늠름해졌어.

남자: 안녕하셨어요.

할매: 아이고, 나야 뭐 글치. 응? 잘 지냈고?

남자: 네, 잘 지냈습니다.

할매: 그래, 그래. 많이 컸네. 엊그제 같은데. 이사 와가꼬 할머니- 할머니- 하고, 그쟈?

남자: 그때는… 네. 하하…

 

오토바이, 쌩- 하고 지나간다.

 

할매: 아이고, 쯧쯧. 사고나면 어쩌려고 저러나 몰라.

남자: 요즘 배달 시키는 사람이 많잖아요.

 

포크레인, 탈탈탈탈, 천천히 지나간다.

 

남자: 저기 교회 쪽에 공사하더라구요.

할매: 허물 때가 벌써 됐나. 지은 게 엊그제 같은데. 가만 보자. 그때 저 군대 간다고 인사하러 오지 않았었나?

남자: 네, 엄마랑 같이.

할매: 아이고, 힘들지? 뭐 휴가라도 나온 거야?

남자: 아뇨, 저 전역했어요.

할매: 아이고! 벌써? 아이고야, 그 인사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언제 나왔대?

남자: 이제 한 달 좀 넘었네요.

할매: 아이고야, 그래. 시간 참 빠르다, 그쟈?

남자: 겨우겨우 나왔는데요, 하하…

할매: 시간이 참 빨라, 응?

남자: 네에….

 

오토바이, 쌩- 하고 지나간다.

포크레인, 탈탈탈탈, 천천히 지나간다.

 

남자: 어디 가시는 길이세요?

할매: 응, 은행 가는 길인데. 길이 좀 헷갈려서 한참 돌았네.

남자: 어디 은행이요?

할매: 저- 국민은행. 여 근처였던 거 같은데…

남자: ……저희 동네에 국민은행이…

할매: 접때 영감이랑 한 번 갔었는데…

남자: 농협은행 아니구요? 농협은행은 저기 내리막길 지나서 있는데.

할매: 에이, 국민은행 맞어, 이눔아. (주머니에서 종이 쪼가리를 꺼낸다) 영감이 적어줬잖아. 국, 민, 은, 행.

남자: 아… 저희 동네에 국민은행이…… 음, 없었던 것 같은데. 있나? 잘 모르겠네요.

할매: 젊은 놈이 나보다 모르면 어떡해. 그 할아버지는 잘 계시고?

남자: 아… 할아버지요.

할매: 아직도 등산 다니시나? 낸 무릎이 아파서 못 갔그든.

남자: 돌아가셨어요. 할아버지.

할매: 아이고! 그랬나. 아이고야, 언제?

남자: 저 군대가고 나서니까… 한 1년 됐네요.

할매: 아이고… 그랬구나. 그 지팡이 없이도 등산 다니던 게 엊그제 같은데… 괜찮나?

남자: 네?

할매: 좀 예뻐했어야지, 할아버지가.

남자: 뭐… 1년이나 지났는데요. 좋은 곳 가셨겠죠.

할매: 그래, 그래. 좋-은 곳으로 가셨을 끼다.

남자: (신호를 보고) 어.

할매: 그래, 가자.

남자: 네, 또 인사 드릴게요.

할매: 그래, 그래. 어여 가. 참… 엊그제 같은데. 응.

 

남자, 꾸벅, 인사를 한다.

남자와 할매, 횡단보도를 건넌다.

남자, 어느새 할매를 앞질러 있다.

 

남자: 어, 여보세요? 어어, 걔 석기 있잖아, 왜, 김석기. 이야- 아직도 전역을 안 했어? 걔 입대한 지가 오백년은 된 거 같은데. 아직도 못 나왔다냐.

 

할매, 횡단보도 중간에 멈춰선다.

 

남자: 지금 다 건넜어. 오른쪽? 국민은행 건물? 와- 국민은행 생겼네. 저기 원래 피시방이었잖아. 어어- 2층. 어? 아… 국민은행….

 

오토바이, 쌩- 하고 지나간다.

 

남자: 야 잠깐만. 금방 갈게. 있어. 일단 끊어. 어어, 금방 가.

 

남자, 전화를 끊는다. 뒤를 돌아 할매를 본다.

할매, 횡단보도 중간에 걸터있다.

포크레인, 탈탈탈탈, 천천히 지나간다.

 

할매: 신호가 여간 빨라야지… 참.

 

오토바이, 쌩- 하고 지나가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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