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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

알바몬에 게시된 쿠팡 알바 공고와 마루야마 겐지


어머니.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솔직히 사랑이 뭔지는 잘 모르겠으나, 연명하는 이유의 지분율 중
지대한 투자를 담당하고 계시기에 사랑이라 명명해 봅니다.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알바몬 어플에 게시된 일당 15만 원의 쿠팡 알바 공고 화면을 캡쳐하여
나에게 카톡으로 송부하며
이거 어떻게 하는 거냐고, 어디로 전화하면 되냐고
일방적인 질문을 듣는 나의 심정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나의 어머니.
간단한 답변입니다. 스크롤을 두어 번 정도 내리면요.
일렬의 숫자가 줄 서있습니다. 그걸 전화번호라고 부르고요.
사회통념 상 적당한 시간대에 유선통화를 진행하면요
팀장이란 놈이 전화를 받을 겁니다. 그놈이 뭐뭐를 설명해 줄 텐데요.
그 뭐뭐를 성실히 수행만 하신다면, 일당 15만 원의 세계로 접속할 수 있으실 겁니다. 그런데요,

어머니.
나는 이 간단한 답변을 결단코 당신께 전달할 수 없는 인간입니다.
죽은 눈의 어머니가 죽은 눈의 사람들과 함께
사람 보단 기계 쯤으로 치부되어 삶의 목표가 바코드를 찍는 행위에 몰두되는 인간으로
변모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나의 뇌에선 4K의 화질로 펼쳐집니다.
한국형 드라마를 보면요.
직장 잃은 한 가정의 엄마가 몰래 식당 설거지 알바를 하다가
자녀에게 발각되어 사랑 싸움을 하는 장면이 종종 보입니다.
차라리 그런 그림이 좀 예쁘냐는 생각입니다. 적어도 사랑이란 게 느껴지니까요.
그러나 나의 어머니는 알바 행위를 몰래 할 생각이 없어 보여요.
어떻게 하는 거냐니요. 나는 그 방법을 설명해 줄 깡다구가 없어요.
나는 그럴 깜냥이 안 되는 인간이옵니다. 고통의 세계로 들어감을 예고해주는 어머니에 있어서
내가 취해야 할 태도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알려줘도 불효자가 되옵고요,
알려주지 않아도 불효자가 되는 딜레마의 수렁으로 빠졌습니다.

어머니.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나는 요즘 연극 하나를 올리기 위해 고군분투 하고 있습니다.
우리 연극 팀의 연습실은 경기도 안산에 있는데요.
그 편도 2시간의 지하철 안에서 나는 내내 앓습니다. 쿠팡 알바 공고를 보내오는 어머니가 있는데
연극 같은 걸 하겠다고 고집 피우고 있습니다. 일본의 문학계 대가로 취급받는 한 소설가는
성공하려면 부모를 버려라, 하는 말을 하더군요. 저 말에 희망 느끼는 내가 정말로 싫습니다.
구태여 부모를 버린다는 마음을 지니지 않아도 부모의 지원 밑에 여실히 공부하며
오히려 부모 등에 둥둥 업혀 성공을 바라보는 자들이, 저 위에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어서요.
나는 당최 왜, 부모를 버려라, 하는 말을 곱씹어야 하는 사람이어야 하는 겁니까.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당신을 못 버립니다. 안 버리는 게 아니라 못 버려요.
나는 그럴 깡다구가 안 되고 그럴 깜냥이 안 되는 인간입니다. 워낙에 정도 많고 겁도 많아요.
휴학을 결정한 나를 안쓰러이 여기지 말아요. 보다 소중한 걸 지켜야 한다는 게 나의 결론입니다.
나는 이 주공아파트를, 어머니를, 우리의 세상을 우선으로 지키고 싶어요.
이것들이 무너지면, 나라는 인간 자체가 무너진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어서요.

나의 어머니.
알바몬을 들락날락하지 마세요. 스마트폰을 터치하는 불쌍한 검지 손가락을 멈추세요.
아들이라서가 아니라요. 좀 더 젊은 놈이 고생이란 걸 해야 맞는 거 아닙니까.
아직 인생을 공부하고 있는 놈이 고생을 짊어지는 게 맞다는 판단입니다.
병신 같은 것들은
휴학을 한다고 하니 나를 게으른 놈 취급해요. 예술은 시기가 중요하다면서
끊김 없이 가야 한다면서요, 단순한 접근을 통해 나에게 훈수를 두곤 합니다.
씨발 놈들, 아무것도 모르면서.
하는 증오를 거두고 싶지만 세상이 나를 이해하지 않네요.
요즘은 세상이 왜 나를 이해해줘야 하지, 같은 생각을 하곤 합니다.

어머니.
참 뭐 같은 세상이네요.
이 뭐 같은 세상에서, 나라는 개인이 도전이란 걸 해볼 생각입니다. 그것도
일본 문학계의 거장을 상대로요. 마루야마 겐지라는 사람을 상대로
이 뭐 같은 세상을, 앞으로는 살아가야 할 거 같습니다.
저 사람이 말한 성공을 위해 부모를 버려라, 하는 말에 반기를 들고
나 타파해보려 합니다. 한부모 가정의 비극은
초등학교 체육대회서의 인원 부족으로 끝나지 않는군요. 부양의 의무가
시기적으로 세 배는 앞당겨지는 것으로 비극의 형태는 변하였군요.
이 뭐 같고 비극 같은 세상 속에서
마루야마 겐지의 눈깔을 노려보고 있습니다. 저 사람을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그럴 깡다구와 깜냥을 지닌 인간으로 성장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어순을 바꾼 문장을 하나 놓고 가야 하겠습니다.
나는 사랑을 잘 모르지만요.

사랑합니다. 나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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