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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

어린 나를 어린 날에 생각하며 어른이 될까

집 앞 CU편의점에 갈 바에는 아파트 단지 대표 슈퍼마트인 백현마트로 가서 처음처럼 쏘주를 사는 것이

어느 방면으로나 이득인 거 같은데,

가격도 320원이나 저렴하고, 집을 기준으로 CU편의점 보단 백현마트로 가는 것이 물리적인 거리상 2분 더 빠르다.

헌데 백현마트에서 쏘주를 사는 건 뭔가 좀 미안한데,

구체적으로 뭐가 미안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백현초등학교를 다녔을 시절부터 백현마트에 들러 600원짜리 500ml 캔 밀키스를 사 먹었었는데, 이제 와 그곳에서 처음처럼 쏘주를 사기에는, 좀, 불편한 감각이 가시질 않는다. 그러니까,

모르겠다는 거다.

백현초 2학년 6반에서 하동훈 삼촌의 키가작은꼬마동훈이를 열창했던 게 지금은 방구석에서 폼 잡으며 신승훈 삼촌의 미소속에비친그대를 읊조리는 건 뭔 상황인지도 모를 만큼 시간은 내 키를 훌쩍 넘었고

키가작은꼬마동훈이를 좋아했을 적엔 나의 키가 작았고, 미소속에비친그대를 좋아하는 지금에는 울고 싶지 않고, 다시 웃고 싶어진 거라고 이해하는 게 옳겠지. 캡틴선장 같았던 울 엄마는 실상 같은 처지의 선원이었는데,

어느새 내가 물리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도움을 줘야 할 선원이 되어버렸어. 이럴 거면 당최 왜

그간 캡틴선장인 척 메쏘드 연기를 펼쳤나 싶고, 백현마트로 향하기 위해선

아파트 단지의 코끼리놀이터(코끼리 동상이 있어 코끼리놀이터라 불리운다. 오! 칠드런의 작명 센스여!)를 지나가야 하는데,

그 코끼리 동상 옆에서 야구 빠따를 쥐고, 행동은 동적이지만 마음은 정적인 채 빠따스윙 연습을 하던 야구부 시절의 내가 생각 나.

역시나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게, 행동은 정적인데 마음은 동적인 채 이런 글이나 끄적이고 있고

키가 작았을 땐 토끼와 거북이 같은 동화를 보며 웃었지만 지금은 어린 왕자 같은 동화를 보며 울고

쏘주는 꼭 원샷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이제는 알아챘다는 거다. 허나 이리도 어렸던 나를 늘어놓으며 푸념 또는 한숨 같은 글을 쓰고 있을 적에도 여직 스물다섯이 됐을 뿐이라 한참 어리다는 걸 알고

어른이 되는 건 무엇인지 눈을 감고 오 쩜 이삼 초 생각을 해본다. 결국에는

인간은 다른 인간에게 캡틴선장의 노릇을 해줘야 하는데

그 캡틴선장의 자질은 그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는다. 같은 선원이긴 선원인데

등떠밀려 캡틴선장을 맡은 탓에 메쏘드 연기라도 펼쳐야 하는 것이다. 키가 작은 꼬마 동훈이 삼촌은 여전히 키가 작아

키가 작음에서 발생되는 유머 코드를 예능방송에서 써먹는 것처럼

애는 평생 애인데, 그중 더 많이 산 애는 덜 산 애를 어떻게든 지켜줘야 하겠지. 신승훈 삼촌도 여직 2023년에도

그만 울고 싶고, 이젠 웃고 싶은 거야. 나도 그런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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