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국립현대미술관 앞 잔디밭 광장에서 K막걸리&김치축제가 열렸다. 지나갈 적마다 이 막걸리 축제를 홍보하는 대형 포스터가 약속을 지켜낸 것이다. 애인과 함께 간단히 끼니를 해결할 목적으로 식당을 두리번거리다가 시끄러운 소리에 구경이나 해보자며 막걸리 축제의 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본 광경은, 과연 축제였다. 각종 지역의 막걸리를 시음해 보라는 각 부스마다의 시끄러운 목소리와 초청(된 엄청난 무명)가수들의 알 수 없는 멜로디와 노랫말, 그리고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초면일 게 분명한 아저씨 아줌마 또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정체 모를 춤사위였다.
그런 모든 것을 지켜보며, 얼굴이 새빨개진 잔디밭의 돗자리 취객들은 각종 막걸리를 열심히 원샷하고, 잔에 남은 잔여 막걸리를 바닥에 열심히도 뿌려댔다. 초록 잔디의 신변과 건강이 걱정될 정도로 각종 지역 막걸리의 뿌려짐으로 인해 잔디들은 머리를 적시며 고개를 푹푹 숙였다. 잔디의 반응을 예상해 보자. 아 씨발 강원도 막걸리! 아 씨발 춘천! 아 개 같은 Seoul!
쌍욕의 잔디에겐 미안하다만, 막걸리 축제의 분명한 즐거운 분위기를 목격하며, 나는 술을 좋아하는 우리 엄마가 이곳을 참 좋아할 것 같다고 생각을 했다가, 다시금 엄마가 나에게 선사하였던 많은 고통들, 분명 나를 힘들게 길러주셨지만, 그게 신체적이든 언어적이든 정서적이든, 그 모든 폭력을 생각해 내며, 본가인 경기도 용인시를 떠나 이곳 충청북도 청주시로 몸을 옮기게 했던 다짐(가족 같은 건 내 인생에 없다)을 굳혔다.
애인과 기분이라도 내자며, 시음한 막걸리 중 제일로 맛났던 (그 흔한 어디어디에서 흔한 대상을 탄)막걸리와 불닭고추전을 16,000원 계좌이체하여 구매하고 행사 주최 측이 편의상 펼쳐낸 (그 흔하디 흔한)플라스틱 테이블과 의자에 앉아 나무젓가락으로 집어 먹었다. 이 막걸리 축제엔 잔디밭에 돗자리를 펼 수 있으니, 다음엔 키우는 반려견 삐와 장근이를 데리고 와보자고 약속하면서.
경기도 용인시에 9개월 만에 방문해야 했던 건, 다름 아닌 돈을 쓰기 위해서였다.
경기도 공무원(놈)님들이 펼쳐낸 청년정책으로 인해 나에게 용인시지역화폐가 차곡차곡 쌓여 무려 백만 원이란 거금이 되어있었는 데다가, 충청북도 청주시로 전입신고를 하루 빨리 해야 했기에 지역화폐 백만 원을 하루빨리 써야 했다. 해서 용인시로 향해 하루 동안 무엇이든 먹고 즐기고 쟁여놓을 목적이었다. 애인이 쏘카로 대여한 아이코닉 전기차 조수석(나는 운전면허증이 없어 애인이 운전을 하고 내가 조수석에 착석한다. 늘상 나의 테스토스테론이 격하됨을 느낀다)에서, 용인 살 적에 내가 오래 알바하였던 카페에 가서 파니니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먹고, 저녁엔 역시 오래 알바하였던 고깃집에 들러 뼈삼겹살을 먹자고 얘기하였다. 내 말이면 다 좋다는 애인은 반전 없이 좋다고 얘기하였다.
꼬르륵 배를 움켜쥐고 카페에 방문한 나는 당황하였다. 특유의 밝은 목소리로 인사해주는 오랜만의 안면인 사장님을 기대했으나 웬 우중충한 중년 남자가 카운터에 앉아 있었다. 게다가 내 베스트 메뉴인 토마토바질파니니와 불닭치킨샌드위치라는 메뉴도 사라져 있는 게 아닌가. 아마 간판을 그대로 하여 카페를 인수해 저 우중충한 중년 남자가 사장님이 되어있는 것 같았다. 아쉬울 대로 오래 알바하였던 카페를 빠져나와 (흔하디 흔한)프렌차이즈인 투썸플레이스로 향해 폭신폭신생크림케이크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셨지만, 역시 토마토바질파니니가 그리웠다.
아뿔싸. 저녁으로도 예고하였었던 뼈삼겹살 집, 내가 오래 알바하였던 고깃집이 아예 쌩 다른 프랜차이즈 고깃집 간판으로 바뀌어있는 게 아닌가. 카페에 이어 두 번째 계획 실패를 저질러버린 나는 애인 앞에서 민망한 얼굴을 하였다. 혹시 몰라 프랜차이즈 고깃집 내부로 들어가 사장님 부부는 그대로가 아닌가 둘러봤지만 웬 시커먼 남자들 뿐이 없었다. 아쉬울 대로 이마트 부근 9층에 위치한 레스토랑에 방문하여 봉골레파스타와 소고기 스테이크를 지역화폐로 결제하여 먹었지만, 뼈삼겹살에 찍어먹는 수제 멜젓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는 것이었다.
모든 계획이 틀어져버린 용인에서, 밍키가 보고 싶었다. 용인 살 적에 본가에서 같이 동고동락하며 지냈던, 우리 치와와 밍키. 마침 일요일이라 마주치기 껄끄러운 엄마(직업이 골프장 캐디인지라, 주말에 더 바쁜 스케줄을 소화한다)도 본가에 있지 않을 터였다.
오랜만에 마주한 밍키는, 슬프게도 달라져 있었다. 나이가 든 치와와의 몸은 더욱 떨었고, 어딘가 맥이 빠져 힘이 없어 보였다. 짖는 왈왈 소리도 더욱이 앙칼져야 하는데 그 피치가 현저히 낮아졌고, 오른쪽 눈 백내장은 악화되어 적확한 오드아이를 형성했다. 자주 못 보러 와서 미안하였고, 자주 못 보는 만큼의, 딱 그만큼 보고 싶음의 에너지를 내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 또한 미안하였다. 나를 알아볼까 말까 한 비즈니스를 취하던 밍키는 산책이 채 5분도 안 되어 집에 들어가겠다고 앙상한 다리를 돌렸다. 엘리베이터를 열어주고,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러 열어주니 녀석은 등을 보이고 피치 낮은 소리로 왈왈 짖었다. 과거 약하고 작은 몸인데도 아집과 고집을 포기하지 않던 자신감의 치와와 밍키가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는 것이었다.
애인과 용인에서 쏘주와 맥주를 무려 4차까지 해서 쳐먹(정확한 표현이다)었는데도 내 지역화폐엔 60만 원이란 거금이 남아있었다. 김치전과 참치회, 김치짜글이와 닭목살소금구이로 배가 부를 대로 부른 우리는 더 이상 음식과 술을 섭취하기엔 무리라며 GG를 쳤다.
해서 이 60만 원이란 거금을 얼른 소비할 방법을 강구하다가, 이 용인이란 동네에 CU편의점을 운영하고 있는 친형이 생각났다. 편의점은 어느 동네 마트보다 물가가 비싸기야 하겠지만 친형 CU편의점 매출을 올려 생색을 낼 수 있고, 우리의 당분간 식비와 생필품을 적잖이 아낄 수 있는 기회였다.
걸림돌이랄 것이, 친형과 나의 사이는 그리 좋지 않다는 데에 있었다. 그리 막 나쁜 것도 아니지만, 좋다고도 결단코 말할 수 없는, 그 어색한 지점에 우리 형제는 서 있으니까.
그러나 가족이란 떨어지면 살가워진다고 했나. 성인 이후 본 적 없었던 친형의 자상한 미소를(오글거려 조금은 힘들었다) CU편의점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더불어 60만 원치 생활품목을 살 거면 이러이러한 걸 사는 게 어떻겠냐 리더의 자세도 뽐내고, 나의 애인에게도 그리 친절하게 대해주는 게 아닌가.
왜인지 모를 오글거림과 어색함에 진땀 흘려 60만 원의 물품들을 70L 쓰레기봉투 세 개에 담고 나자, 친형은 바로 옆 이디야커피에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두 개 사와 나와 애인에게 주었고, 심지어는 (흔하디 흔한)맛있는 거 사 먹으라는 멘트를 날리며 신사임당이 그려져 있는 오만 원 권 두 장을 내 손에 쥐여주는 게 아닌가. 과거 냉철하고 웃음 하나 보이지 않았던 친형이, 그렇게 그립진 않았다.
충청북도 청주시의 집으로 귀가하여 60만 원의 편의점 물품들을 냉장고, 천장서랍 등에 정리하고 나자 애인은 재택근무를 위해 제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마저 남은 잔청소를 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전동밀대로 바닥을 닦았다. 그러고 나자 나와 애인이 용인에 가 있는 하루 동안 방치되어 있던 반려견 삐와 장근이가 눈에 밟혔다. 초롱초롱한 눈이 어찌 산책을 나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개 유모차와 개 목줄을 양손에 쥐고 도착한 국립현대미술관 잔디밭 광장은 휑했다.
각종 지역 막걸리를 시음하라던 각 부스들의 시끄러운 목소리도, 막걸리축제를 홍보하던 대형 포스터도,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정체 모를 춤사위도 없어져 있었다. 가을의 영향으로 정수리만 노랗게 익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는 것을 보며, 나는 센치해졌다.
그래. 이렇게 다 사라지는 것이다. 막걸리 축제도. 용인시의, 나도. 또,
토마토바질파니니와 뼈감겹살에 찍어먹는 수제멜젓도, 작은 몸에 비해 아집과 고집의 자신감으로 찬 활기 있는 밍키도, 냉철하고 웃음 없는 친형도. 비록 9개월이란 짧은 시간이지만, 여하간 사라지는 것이 이렇게도 많은 것이다. 오늘 역시 이렇게 지나가는 것이다.
겉멋 든 생각으로 벤치에 앉아 있던 나는 저 강아지 녀석들을 놀아줄 작정으로 잔디밭에 몸을 들였다. 그 순간 시큼하고, 구릿구릿하고, 쓰디쓴 냄새가 후각으로 훅 끼쳤다. 돗자리 취객들이 잔디밭에 그토록 각종 지역의 막걸리를 뿌려댄 탓에, 막걸리 축제는 끝이 났지만 막걸리 냄새는 구릿구릿하게 남아있었다. 아, 씨발 막걸리 냄새. 생각하며
패딩 주머니에 든 신사임당 오만 원 권 두장의 감각이 느껴졌다. 친형이 (흔하디 흔한)맛있는 거 사 먹으라는 상투적인 멘트로 쥐여 준 오만 원 권 두장. 나는 유치하게도, 오글거리게도, 참 상투적으로. 센치한 기분이어라 그럴지도 모르겠다만.
가족의 냄새를 맡았다. 그러자 자연스레 엄마가 떠올랐다. 또 이러저러한 폭력이 생각났다. 그러나 내일은 엄마에게 전화를 한 번 드려보자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과거에서 풍겨오는 냄새로 심호흡을 못하랄지라도 숨통을 어느 정도 터주면서. (흔하디 흔한)가족 생각을 오래간만에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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