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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

일기

https://youtu.be/xb4Z4pxvgWs



대한민국이 16강에 진출하는 것을 보며, 도저히 나라는 개인에게 당도할 이점이 없는데도 기쁨에 사무치는 새벽이었다. 손흥민과 이강인과 황희찬 같은 고유명사를 유튜브에 연신 검색해보는 새벽이었고, 그들의 골인 장면을 담은 동영상을 재생할 때마다 활기찬, 웅장한 함성, 아마 대한민국 사람일 것이 분명한 함성을 들으며
골대의 그물망이 출렁이듯 외로움도 요동쳤다. 혼자 있는 시간을 반강제적으로 자처하며

이상하리 만큼 나는 나의 방을 꾸미기 시작했다. 내 통장에서 한 달 4,900원을 빼가는 쿠팡에 접속하여
크리스마스 전구와 LED불멍과 오로라 스탠드를 구매하며
휘황찬란하게 변모해가는 나의 5평 남짓한 방을 멍하니 바라보는 시간을 가지기도 하였다. 노무현의 서재와는

비할 바가 안 되는 김우근의 서재는 초라하지만
책 하나하나엔 나의 지문이 분명히 묻어 있으리라. 머리가 길어져 감에 하루도 길어져 간다. 종종 지루함을 느끼고
종종 긴박함을 느낀다. 일차원적 욕구에 잡아먹히지 않으려 갖은 노력을 해봐도 반은 허사였다. 이건 정말이지 인간이 아니라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잖아.
하고 생각하는 나의 방에는 우연찮게도 유발하라리의 <사피엔스>가 꽂혀있다. 인지혁명으로 촉발되어

농업혁명을 지나 산업혁명을 지나 지식혁명을 향해 가는 인간이라고 유발 하라리는 말하지만, 그 인간의 범주에 끼어있지 않다는 소외감도 골대의 그물망을 출렁인다.
박민규의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읽고 있다. 못생긴 여자와의 로맨스를 읽으며, 박민규가 심어놓은 팝송을 수집한다. <First time ever i saw your face>와

<Strawberry Fields Forever>을 종종 듣는다. 쿠팡에서 구매한 3만 원 짜리 블루투스 스피커는 5평 방을 메우는 음악을 더욱이 풍성하게 해주고, 비틀즈의 <I Will>을 더욱이 발랄하게 해준다. 가만히 누워 소재를 생각하기도 한다. 이 세상은 공사 중이니, 천천히 가도 돼. 같은 대사를 떠올렸을 땐 나와의 카톡방에 들어가 메모를 하기도 하며 하찮지만 이 세상을 정의내보려 애를 쓰기도 한다.
실로 오랜만에 OO이를 만나, 어정역에 새로 생긴,

상호명은 까먹어버린 고기집으로 가 돼지특수부위를 구워 먹었다. 돼지고기도 독보적으로 맛있었다만, 파김치와 양파장아찌, 묵은지와 멜젓 등의 밑반찬들의 구성이 탁월했다는 생각이다. 이건 어느 부위냐느니, 국산이냐느니, 체인점이냐느니 하고 질문을 하자 이모 뻘의 직원 분이 쩔쩔매며 설명을 해주었었다.
요즘 무기력하다는 말을 정인이에게 했고 글을 쓰고 싶지 않다는 말을 농담처럼 하였다. 자칫 진지하게 빠져버릴 듯한 이야기 소재를 OO이가 잘 디펜스하며 시덥잖은 이야기로 넘어갔었다. 애인을 만나서 까지 힘든 이야기를 할 필욘 없었다.

요즈음은 OO이가 나를 잘 만나지 않으려 든다. 이과 계열을 전공하는 3학년의 삶은 남자친구를 만날 시간적 여유가 생기지 않아 보였다. 쿨한 태도를 지니며 맘껏 공부하게 두고 싶으나, 그게 잘 안 된다. 징징대는 작태로 어리광을 부리게 되는데 철저하게 반성을 거쳐 본다.
허탈하고 허무하고 허상 같은 하루가 이렇게 또 지나간다. 쿠팡에서 산 크리스마스 전구가 반짝이고,

LED불멍은 생각보다 소음이 꽤 심하여 틀어놓는 경우가 거의 없다. 오로라 스탠드를 파란색으로 설정하여 우울한 나의 마음을 5평 방 안에 가득 방사를 해보며,
나는 일기를 쓴다. 일지 말고 일기를 쓴다. 그리고 이것을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에 공개하며 미완성의 용기를

미약하게나마 채운다. 사피엔스들과 함께 지식혁명으로 향하고 있진 않지만 나만의 무슨무슨 혁명을 이룩하고자 한다. 저장해놓은 재생목록의 음악이 떨어지자, 유튜브 알고리즘은 생전 처음 듣는 팝송을 재생해준다. 나는

그것을 들으며 자자. OO이에겐 쿨한 태도를 보이자. 대한민국이 8강에 갈 수 있을까,하는 도무지 나라는 개인에게 이점이 없는 희망을 품으며 자자. 골대의 그물망이 출렁인다.